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감독 펠릭스 헤른그렌 (2013 / 스웨덴)
출연 로베르트 구스타프손,이바르 비크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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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초반부터 강력한 이미지를 마구 뿌려 댄다. 폭발물이 끊임 없이 터지는 소리는 주인공의 해맑은 모습이 교차되면서 놀라움을 넘어서 공포를 느끼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 폭탄에 미치고 덜떨어진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했다. 어이 없는 죽음들이 연속해서 발생할 때는 삶의 덧없음을 알려주는 건가 싶었고, 역사상 중요한 일들이 성급한 판단이나 사소한 실수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줄 때는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엄청나게 스펙타클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만큼이나 충격적이게 엄청나게 소박하고 단순한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에 충실하라”

영화가 이 주제로 서서히 수렴해가는 시점에 나는 폭탄과 시체와 폭발음과 총소리 때문에 지치면서도 흥분되고 현기증이 나면서 헛웃음을 웃는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그 이상한 심적 상태에서 어찌나 이것저것 생각나게 하는지 뇌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좀처럼 놔주질 않아)

이 이야기가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하는데는 알란과 비교되는 두 인물의 덕이 크다.

첫 번째는 그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그 어머니의 말마따나 “생각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무슨 일인지 알면 정말 어이 없어 놀랄만한)에 온 몸을 바쳐 헌신하다 일찍 죽었다. 남편을 잃고 힘든 삶을 이어나가다 결국 숨을 거두는 그의 어머니는 “난 어떻게 사느냐” 라고 묻는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너희 아버지처럼 생각을 많이 하지 말아라. 살다 보면 다 살아지는 거다.” 라고...

알란은 정말 그 유언처럼 산다. 학교도 그만두었고, 자신이 재밌는 일(그는 잊을만 하면 폭발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 나는 그저 폭탄이 너무 좋았을 뿐이야 라고 하면서)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건이, 시간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절대 앞일을 계획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되었다. 산전수전의 스케일도 만만치 않다. 알란은 잘 몰랐겠지만 (그가 이중 간첩을 할 때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날라 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 주변의 시대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19, 20세기의 사건들은 대부분 다 관여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명한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장수의 상징적 나이인)100살까지 산다.

두 번째는 돈가방을 들고 도망(?)치던 도중에 만난 알바생 베니. 그는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얕은 잔 지식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볼 때 극 중 인물 중 가장 정상적이다.. ㅋ)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고 공부를 하면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다소 산만한 그의 지식욕은 폭발물에만 집중해서 살아온 알란과 매우 대조적이다.(그렇다고 또 알란이 폭발물에 대해서 해박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알란의 아버지와는 달리, 영화의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현재를 향해 뛰어든다.

두 인물들은 알란의 생활방식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를 고민하게 한다. 물론 알란의 관점이 매우 많이 강조되고 나머지 두 인물들은 강력한 인상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이다. 많이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행복한가.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미래를 더 풍요롭게 해 주는가. 고민이나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

화면 속에서 간간히 나를 웃게 한 소소한 장면들은 대부분 알란 역을 연기한 로베르트 구스타프손의 멍한 표정(클로즈업)이었다. 알란 역을 연기한 로베르트 구스타프손은 내내 멍한 표정으로 폭발과 화염속을 뚫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코미디언 출신이라고 하는데 정말 100세 노인 다운 표정연기가 진국이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인과관계 없이 운에 따라서만 일어나다 보니 몇십년의 인생이라는 것이 죽을만한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 몇십년 동안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사고 많은 시대에 내가 살아있는게 얼마나 기적인지 몇번인가 깨달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오랫만에 지하철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열차가 탈선하지 않을까 걱정했던거 같기도 하다.

웃기는 엄청나게 웃었는데 긴장된 상태로 웃어서인지 목뒤가 나무처럼 뻣뻣한 느낌이었다.
본격 재밌는데 지치는 영화.

덧. 원작이 있던데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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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날숨/잡담 2009.05.29 14:36

#1
사람이 무엇에든 익숙해지고 마는건, 본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에든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팽팽한 긴장감에서 나오는 신선한 사고는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 같다.

#2
형태에는 제한이 있지만 색에는 제한이 없고,
마음에 드는 형태을 찾는 것 보다 마음에 드는 색을 찾는게 항상 더 어렵다.
색이 마음에 드는 구두를 보면 참을 수 없이 사고 싶어지는게 그래서인가 보다.

#3
영화 '마더'를 봤다.
미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계속 들어서(정신없이 흔들리는 앵글이나 OST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루하다 싶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내용만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장면 장면을 생각하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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